11/27/2016

La porte au numéro 4.

Photo credit : JiSun LEE / 2016.11.11 / Paris

이사
9년의 생활동안 한국의 부모님 집도 프랑스의 나의 집도 자주 이사를 하게됐다.

태어난곳에서 오래도록 살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휩쓸리는 한국의 여러가지 파도와 함께 그저 한곳에 머물것 같던 우리가족도 상황에 쫓기거나 조금이나마 나은 조건이라고 여겨지는 곳으로 옮겨다니기 시작했다. 그저 당연한 번호로 여겨지던 103번지. 5355라는 집번호 뒷자리. 동네 길을 넓힌다고 집을 두부잘라내듯이 잘라내서 새로 개조가 되었을 때나 2층에 이모네나 가장 친한 친구네가 들어왔을 , 주변 집들이 제각기 다른 모양의 빌라로 바뀔 . 그럴때도 몰랐고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지나갔다. 그리고 인생에 처음으로 이사. 이사를 옮겨놓고 아빠차를 타고 새집으로 가던 때의 분위기와 느낌이 그대로 기억난다. 오르막길을 따라 계속해서 운전했고, 아직 이삿짐이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한 집에서 방이라는 곳에 잠시 들어가서의 느낌은 정말 싫었다. 괜히 짜증이 났고 울고 싶었고 정이 안갔다. 이후로 우리집은 계속해서 이사를 했다. 유학을 떠난 후에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한국에 2년에 한번정도 갔기 때문에 한국에 갈때마다 새로운 집으로 가게됐다. 서울의 동쪽 , 서쪽 . 도착한 날은 아빠가 동네를 조금 설명해주고 서울가는 교통편을 알려주는게 당연한 첫번째 일과였다. 집에 가도 집이 아니였고, 광화문이나 나오면 한국에 왔구나 싶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도 이사를 많이 했다. 비로소 지금의 집에서는 여러해를 보내고 있다.

Grenoble에서 홈스테이를 하다가 집에 공사를 하는 바람에 엄마네로 첫번째 이사. 짐도 별로 없었고 집주인의 차로 옮겨서 쉬웠다. 그저 지낼 알았지만 나의 조용함을 답답해하던 조금 히스테릭한 집주인 엄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두번째 이사. 비오는 오빠의 까만 후드티를 입고 버스를 타고 여러번 왕복해가면서 이사했다. 처음 혼자 이사해봤고 처음 진정으로 처량해봤는데 동시에 이집을 나와야만 한다는 의지가 너무 강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혼자살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몇달간 교환학생을 가는 프랑스 여학생의 집에 sous-location. 요리도 하고, 집주인이 허락하지 않아서 못했던 친구 초대도 하고, 샤워도 마음대로 하고, 집에 인터넷도 되고.. 좋았다

그리고 Grenoble에서의 어학수업을 마치고 여느때처럼 매달 마지막날 수업 선생님과 반친구들이 모여 피크닉. 그날 돌아와서 조금더 깊은 정을 나눴던 중국친구 W 떠나기 청소를 도와줬다. 노인과 같이 살던 친구라 살림을 잘했다. 지금은 노인의 죽음 후에 여러가지 우울증세가 심해져서 중국으로 돌아간지 벌써 5-6 되었을 친구. 연락은 끊겼다. 다음날 아침 이불빨래까지 해놓고 보금자리 Dijon으로 세번째 이사. 전에 인터넷 직거래 사이트에서 집을 보고 당일 기차로 방문을 하고 계약도 했던 자그마한 . SNCF 서비스로 캐리어 두개를 보내고, 나는 당일에 캐리어 두개와, 하나와, 매는 가방 하나, 이젤, 아트백 그런것들을 한꺼번에 지고 기차를 탔다. 지금 생각해도 Dijon 기차역에서 그때 집까지 빠르면 15분이면 가는 길을 짐이 너무 무거워서 1시간 반에 걸쳐 갔다. 더운 여름이였다.

처음으로 Chez 누구가 아닌 이름이 붙은 . 작지만 창가로 보이는 도시도 예쁘고 건물의 입구도 넓찍했다. 그런데 1년을 살다보니 1학년 수업중에 많았던 뎃상이 자꾸만 늘어가고, 보관할 곳이 점점 없어졌다. 지난 이사의 기억들이 있기때문에 주변으로 집을 찾았다. 그리고 네번째 이사. 이사를 할때는 무엇보다 3-4층에서 짐을 내리고 올리는게 가장 힘들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들에 살고 유럽의 평균적인 건물의 계단은 둥글둥글 나선형이거나 말이안되게 좁거나 해서 장을 조금 많이봐도 쉽지않다. 그런데 캐리어를 30킬로정도 채워서 하루에 몇번씩 며칠을 오르내리다 보면 내릴땐 캐리어를 거의 던지게 된다. 나는 옷이나 물건을 사면 그게 아주 싸구려여도 오래 얌전히 쓰는 편인데 캐리어는 그래서 유학생활동안 자주 바꿀수 밖에 없었다. 5번째 집은 무려 2 pièces. 유학생활 가장 집이였다. 여기 사는 동안 엄마도 한번 다녀가고, 새해에는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벽에 종이를 붙여놓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2년을 살았다. 그리고 떠나게됐다.

이사할때마다 짐을 버려대고 나름 노하우가 생겼다고 해도 맨손으로 하는 이사는 체력의 가장 한계를 겪게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주변으로 집을 찾았다. 물론 방은 하나로 조금 싼곳으로. 그래서 다섯번째 이사. 이곳은 지금까지 가장 작은 곳이였다. 친구도 초대하지 않았고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곳에 사는 동안 비디오를 시작했다. 작업 과정이나 세계가 매력적인게 1번이였지만 종이나 maquette같은 작품에 대한 짐이 생기지 않는다는것도 당시 내가 비디오에 빠질 있었던 주요한 이유였던것 같다. 이곳에서도 2년을 살았다. 다시 살아볼 있을까 싶은 . 아마 수는 있을꺼다. 그래도 이곳에서 많은 작업과 일들이 지나갔으니까.

여섯번째 이사는 Paris로의 이사. Grenoble에서 Dijon으로 갈때도 그랬지만 Dijon에서 Paris 올때도 조금의 미련도 없이 떠났다. 마지막 석사 학위 시험을 보고 이틀뒤부터. 당시 Sy언니의 남편이 많이 도와주셨고, 그분이 지금의 집을 구해주시기도 했다. 꼭대기라고 해도 겨우 4-5층이지만 그런곳에서 작은 창으로 하늘을 빤히 바라보는게 익숙하던 나에게 이곳은 RDC. 그거 하나만 빼면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물론 월세는 Dijon 2-3.

이후로 3년반, 가장 오랜시간동안 한집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심지어 내년부터는 두집살림을 시작하려고 한다. 충분히 감당해 낼지 아님 결국 하나를 정리하게 될지, 어쩌면 양쪽 버리게 될지. 살아봐야 안다. 살아봐야 한다.


유물
첫번째 집에 살기 시작했을 , 처음 장을 보러가서 사온 물건 중에서 지금까지 계속 같이하고 있는 물건이 두개가 있다. 그냥 있는것이 아니라 여전히 일상에서 아주 자주 사용하는 아이템

1) cafetière italienne à 2 personnes
가장 뜨겁고 진한 커피를 쉽게 만들 있다. 기본스타일의 모양, 가장 작은 사이즈. 쇳덩이이기 때문에 망가질일이 없다. 이사할때 깨질 일도 없고, 전기 스토브이다보니 그을릴일도 없다. 가운데 필터쪽 고무가 낡긴 했다. 내년중에 한국에도 같은걸 하나 사다놓을까 한다.

2) sèche-cheveux

프랑스에서 전자제품을 파는 양대산맥 Fnac Darty. 그중 거리상 가까웠던 Darty 먼저 가보게 됐다. 가장 싼것중에 두번째 것으로 헤어드라이기. 지금까지도 매일같이 쓴다. 대신 어디 갈때는 왠만해서 드라이기가 있거나 그냥 없이 말려도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크고 화려한 전자제품들을 쓰다가 오면 뭔가 작고 초라한 바람을 낸다. 몇일 지나면 그런느낌없이 역할을 해내기만 한다. 내가 가진 많은것들이 그렇다. 나의 échelle 맞는것들